해방과 6·25 발발을 예측한 근대 周易 연구의 대가 이야기 命理學 ―⑨ / 也山 李達의 생애와 사상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cyh062@wonkwang.ac.kr) 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也山 李達이다. 두 사람의 특징을 굳이 구분한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巨視的 周易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이야산은 일상사에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微視的 周易에 능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微視周易과 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는 반면 이야산을 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우리가 보통 역술(易術)이라고 말할 때, 그 범주에는 ‘주역’과 ‘사주명리학’이 모두 포함된다. 역술의 대가라고 하면 이 양쪽에 모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일컫는다. 주역만 알고 명리를 몰라도 안되고, 명리만 알고 주역을 몰라도 깊이가 없다. 양쪽을 모두 알아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 양자는 다르다. 주역은 팔괘(八卦)를 조합한 육십사괘(六十四卦)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한다면, 사주명리학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를 기본으로 한 육십갑자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방법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예측(predict) 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주역은 음양에서 출발하여 사상(四象),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육십사괘로 뻗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를 수(數)로 표시하면 그 뻗어나가는 방식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즉 2(음양)-4(사상)-8(팔괘)-64(육십사괘)의 방식이다. 반면 사주명리학은 숫자로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육십갑자 모두를 음양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오행으로 곱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첨가되는 부분이 생년, 월, 일, 시라는 네 기둥이다. 그래서 사주 보기가 훨씬 복잡하다. 주역으로 어떤 사람의 점을 쳐 볼 때는 ‘지금 당장’(now and here)만 필요하지만, 사주로 볼 때는 그 사람이 타고난 년, 월, 일, 시가 모두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주역은 점치는 순간 시(時)를 중시하지만, 사주는 시뿐만 아니라 연(年)도 필요하고 월(月)과 일(日)도 알아야 한다. 주역이 OX 방식이라고 한다면, 사주는 사지선다형이라고나 할까. 주역이 디지털 시계라면 사주는 아날로그 시계이다. 주역이 시(詩)라면 사주는 산문(散文)이다. 주역이 압축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 장기가 있다면, 사주는 서사적인 전망을 하는데 유리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1억원을 투자하여 사업을 시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주역으로 점을 치면 ‘예스’ 아니면 ‘노’가 나온다. 둘 중 하나로 결판나는 것이다. 반면 사주로 보면 지금은 사업하기 좋지 않지만 3년후 가을쯤이면 때가 온다, 사업을 할 때도 부동산쪽보다 물장사가 좋다는 식으로 나온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체계다. 유의할 대목은 주역과 사주 모두 술(術)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술이라고 한다. 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하면 방법론이다. 강물을 건너가는 뗏목이고, 지붕 위에 올라가게 해주는 사다리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술이다. 좋은 의미다. 뗏목이 없으면 어떻게 강을 건너고, 사다리가 없으면 어떻게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강 건너에 피안이 있고, 지붕 위에 천당이 있다 할지라도 건너갈 수 없고, 올라갈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이다. 당위만 아무리 강조해 보아야 소용없다는 말이다. 달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로켓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그 방법이 바로 술이고, 그 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바로 술사(術士)다. 말하자면 해결사라고나 할까. 術士, 그들은 누구인가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술사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원래는 좋은 개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플레가 진행되면 출발할 때의 오리지널리티가 희석되게 마련이다.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 마치 노자·공자·맹자를 지칭하는 ‘자’(子)라는 존칭이 영자·미자·춘자 하는 식으로 여자들 이름으로 희석되고, 복희씨·신농씨의 ‘씨’(氏)라는 존칭이 아무에게나 ‘--씨’라고 호칭되는 것처럼. 요즘에는 ‘사모님’과 ‘선생’이라는 호칭이 그렇다. 아무 남자나 보고 선생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무 여자나 보고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고준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술사라는 표현도 시대가 흐르면서 이렇게 타락하고 말았다. 요즘 술사라고 하면 사기꾼 비슷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미신이라는 콘텐츠를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사람이 술사다. 술사를 우리나라 직업분류표의 방식대로 표현한다면 ‘미신종사업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팔자는 직업도 두 개요, 전공도 두 개로 나온다. 직업 중 하나는 대학교 훈장이고, 다른 하나는 미신종사업자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돈을 받고 사주를 보지는 않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업자는 아니지만, 역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광의의 개념에서 보자면 미신종사업자에 포함된다.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물에 풍덩 뛰어들어 발을 적셔야 하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바닥의 모양을 파악하기 힘들다. 세계적인 여성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 Mead·1901~78)가 본국에 남편을 두고도 뉴기니 섬 원주민들의 풍속을 연구하기 위해 원주민 추장의 아들과 결혼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신종사업자의 단점이 지독한 천대를 받는다는 점이라고 한다면, 장점은 명예퇴직이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정년퇴직도 없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무한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 미신종사업이다. 역사도 무지 무지 깊다. 적어도 B.C 3000년 전부터 존재하던 직업이니 5,0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앞으로도 없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른 직장은 40대 중반만 돼도 자리 보전을 걱정해야 하지만, 이 분야는 나이가 들고 흰머리가 늘수록 오히려 신뢰도와 권위가 올라간다. 흰머리와 복채는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젊어서부터 일찌감치 흰머리를 확보하기 위한 비책으로 숙지황을 먹고 무를 먹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누구는 30대 중반의 새파란 나이에 전남 도지사로 발령받고 나서 머리 허연 하급직원들을 제압하기 위한 방법으로 숙지황과 무를 먹었지만, 역술가는 복채를 많이 받기 위해 이를 먹는 수도 있다. 어찌됐든 문제는 확률과 정확도다. 이것이 떨어지면 진짜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명리학은 10세기 무렵에 그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은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다. 그 역사를 놓고 보면 주역이 사주보다 대략 1,500년 이상 앞선다. 그러므로 주역이야말로 동양 역술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역사(周易史)를 대강 훑어보면 주역에 대한 입장은 3가지 분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점서(占書)로써 주역을 대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점을 치기 위해 주역을 보았다. 이 노선을 보통 상수학(象數學)이라고 부른다. 주역의 팔괘와 육십사괘는 일차적으로 형상(象)으로 나타나고, 이 형상은 숫자로 환산된다. 예를 들어 건괘(乾卦)는 1이고, 태괘(兌卦)는 2이고, 리괘(離卦)는 3, 진괘(震卦)는 4로 표현하는 식이다. 점을 치기 위해서는 상(象)과 수(數)에 골몰해야 한다. 주역의 원래 목적은 점을 치는데 있었다. 상수학적 입장이 가장 원조다. 주역 연구의 세 분야 송대(宋代)의 소강절(邵康節·1011~77)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저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상수학적 입장에서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 명저다. 그러나 정이천(程伊川)을 비롯한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소강절의 패러다임을 전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감이 있다. 너무나 거창하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신유학자들의 어록을 모아 놓은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유독 소강절의 어록만 빠져 있다. 괴상하다고 여기고 빼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 대목은 19세기 한국의 민족종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후천개벽’이라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의 연원은 소강절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점이다. 후천개벽설은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고, 일본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우주론이다. 유달리 조선에서만 각광받고 유행하였다. 조선에서의 계보를 살펴보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 소강절의 노선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 이토정(李土亭·1517~78)이고, 토정 다음에는 전라감사로 유명한 이서구(李書九·1754~1825), 그리고 계룡산의 김일부(金一夫)로 계승되었다. 김일부의 영향을 받아 후천개벽을 주장한 민족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동학의 최수운(崔水雲), 모악산의 강증산(姜甑山), 원불교의 박중빈(朴重彬)을 예로 들 수 있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전환기에 한국에서만 유달리 후천개벽설이 민중들에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 부분이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별되는 대목이다. 그 이유는 한국사람들이 그만큼 변혁에 대한 갈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도덕적 입장이다. 점을 쳐 미래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보고 여기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 이 노선이다. 괘를 보고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자기수양의 차원에서 주역을 보고자 한 것이다. 송대의 정이천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이천은 기존의 상수학적인 주역에서 벗어나 의리적인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주역은 내면의 수양을 위한 지침서였다. 조선 중기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1601) 같은 경우가 바로 이같은 사례다. 겸암은 임진왜란을 치른 명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의 호인 겸암은 주역 겸괘(謙卦)에서 유래하였다. 겸손하라는 의미다. 유운룡은 29세때 안동 하회마을 건너편의 산자락에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를 하나 지을 때도 겸괘의 의미를 담았다. 그 정자의 이름은 겸암정(謙菴亭)이다. 겸암정이라 정한 이유는 스승인 퇴계가 제자인 유운룡에게 겸암이라는 호를 주었기 때문이다. 겸(謙)은 주역의 64괘 가운데 15번째에 해당되는 괘로서, 위에는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가 있고 아래에는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가 배치되어 있다. 줄여서 ‘지산겸’(地山謙)이라고 부른다. 지산겸은 산이 땅 위에 있지 않고 땅 밑에 있는 형상으로 겸손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퇴계가 64괘 가운데 하필 겸괘를 제자에게 준 배경에는 유운룡의 평소 스타일이 겸양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과격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다스려 겸손해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때부터 겸암은 평생 겸괘를 의식하고 살았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겸암정의 위치부터 겸양한 자리다.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 건너편에는 ‘부용대’라고 불리는 바위절벽이 솟아 있다. 보통사람 같으면 부용대 위에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하회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터도 평평해서 정자 짓기에는 안성맞춤의 자리다. 그러나 겸암정은 부용대에서 한참 왼쪽으로 내려온 중간지점의 어슴프레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하회마을에서 건너다보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범상한 지점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정상이 아니고 약간 들어가는 중간 지점을 택해 정자를 지었다는 것은 정자 이름 그대로 겸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징표다. 겸암정이 자리잡은 형국 자체도 지산 겸괘가 상징하는 것처럼 산의 정상이 아니고 중턱이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부용대 오른쪽 밑에 겸암을 모신 서원인 화천서원(花川書院)이 있는데, 화천서원의 입구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도 다름아닌 ‘지산루’(地山樓)로 되어 있다. 지산루라는 이름은 지산 겸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작명이다. 겸암은 의리적인 주역뿐만 아니라 상수학적인 주역에도 또한 깊은 조예를 지녔다고 전한다. 겸암에 관한 신이(神異)한 이야기는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세번째는 도교의 내단적(內丹的) 입장이다. 내단은 외단(外丹)의 반대말이다. 외단이 수은과 유황 등을 제련하여 만든 불사약을 지칭한다면, 내단은 외부의 약물이 아닌 인체 내에서 단을 찾았다. 인체내의 하단전에 기를 모으는 방법이 진짜 신선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단전호흡을 중시하는 단학(丹學)의 입장에서 주역을 본 것이다. 주역 계사전에 등장하는 ‘근취제신 원취제물’(近取諸身 遠取諸物)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가깝게는 자기 몸에서 진리를 찾고, 멀리는 각각의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인체를 소우주로 보고, 소우주를 알면 대우주를 알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언급이다. 굳이 바깥의 대우주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소우주를 알면 대우주를 알 수 있는 것이지. 64괘는 대우주뿐만 아니라 소우주인 인체의 변화도 설명할 수 있는 기제다. 내단에서 말하는 인체변화의 핵심은 감리교구(坎離交?)에 있다.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서로 만나는 것이 감리교구다. 감은 신장의 수 기운을, 리는 심장의 불 기운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장육부 가운데 신장과 심장이 만나야 하고, 혼(魂·火)이 백(魄·水) 가운데로 들어가고, 호랑이와 용이 만나고, 물과 불이 만나야만 내단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동양 신비주의의 정수인 ‘황금꽃의 비밀’(secret of golden flower)이다. 반복하자면 내단의 핵심은 감리교구에 있고, 이 내면의 연금술(Inner alchemy)을 설명하는 방식이 바로 주역이었다. 그 내면의 연금술을 주역적으로 설명한 책이 바로 도사 위백양(魏伯陽)이 저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이다. ‘주역참동계’는 오늘날까지 단학의 바이블로 존중받을 만큼 심오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한자문화권 정신사의 최고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서양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조선은 주역의 나라였다. 식자층이라고 하면 모두 주역에 골몰하였다. 공자만 가죽끈이 세번 끊어지도록 주역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공부깨나 한다는 선비들도 평생 주역을 끼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들은 모두 주역 전문가이기도 하다. 사서삼경을 두고 보자. 사서라 하면 ‘대학’ ‘중용’ ‘논어’ ‘맹자’다. 주역, 변혁을 꿈꾸는 자들의 바이블 사서는 도덕적 실천에 관한 문제가 중요하다. 논어를 두고 보더라도 얼마나 군자답게 사는가. 어떻게 처세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도덕 교과서다. 우주와 인간의 심오한 비밀을 탐구하는 내용은 아니다. 대학이나 중용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이러한 책들은 몇번 읽어보면 이해가 가는 책들이다. 문제는 실천이 잘 안돼서 그렇지 지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내용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삼경 가운데 시경이나 서경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주역만큼은 차원이 다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주역을 제외한 나머지 경전들이 문과(文科)에 관한 책들이라면, 주역은 이과(理科)에 관한 책이다. 사서는 암기하면 되지만, 주역은 응용과 분석을 요한다. 더 들어가면 이과이면서도 다시 문과로 되돌아 온다. 주역을 이해하려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리고 팔괘와 육십사괘의 수많은 조합을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실전에 적용하기까지에는 대단히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야 한다. 설령 투자한다고 해도 쉽게 파악되지도 않는다. 한 고개 넘었는가 싶으면 또 한 고개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 식이다. 주역 고수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한 30년 정도 여기에만 골몰해야 무엇이 좀 보인다고 한다. 타고난 자질이라도 있어야 30년 동안이나 골몰하지, 그렇지 못한 범부는 중도탈락이 대부분이다. 골치아프니 적당히 하다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다. 주역을 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이를 실전에 적용하는 사람은 매우 희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갈수록 포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선비들은 주역을 파고들었다고 보인다.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의 최종 테스트는 주역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실력의 차이는 주역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부패한 현실정치에 절망한 재야의 뜻있는 선비들은 주역으로 시대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변화에 미리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주역은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바이블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민족종교에 투신하였던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주역 전문가들이었다. 평생 주역만 한 사람들이라고 할 만큼 이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나치리만큼 주역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정감록’과 함께 ‘주역’은 19세기 변혁을 꿈꾸는 재야 선비들의 전공필수 과목이었다. 그런가 하면 ‘주역’은 ‘당시’(唐詩),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함께 한자문화권 식자층의 3대 공부 과목이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역은 철학이고, 사기는 역사이며, 당시는 문학이다. 소위 문·사·철(文史哲) 삼박자를 대표한다. 이 삼박자 섭렵 없이는 식자층 노릇을 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이 3과목은 전통적 교양으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데, 어떻게 안 씹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맛들이면 골치아프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야산(也山) 이 달(李達·1889~ 1958)은 근세 한국주역사(韓國周易史)에서 특출한 존재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주역을 공부하면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고 간 분이다. 아울러 주역이란 과연 공부할 만한 학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간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위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서구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 분야는 지하 단칸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화려한 고층 빌딩에는 결코 나와본 적이 없다. 비록 지하 단칸방에 파묻혀 있었지만 필자는 야산(也山) 만한 인물은 그리 흔하게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也山, 정밀한 생활주역의 세계 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야산이다. 양자의 경향성을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거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야산은 일상사에서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미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고 보인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미시주역(微視周易)과 거시주역(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쳐다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고, 이야산을 바라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일부는 망원경 주역이고, 야산은 현미경 주역이다. 물론 음양중(陰中陽)이고 양중음(陽中陰)이듯, 망원경 속에 현미경이 포함되어 있고, 현미경 속에 망원경도 있는 법이다. 야산도 민족의 진로와 같은 거시적 전망에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사에 주역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반대중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인물은 일부보다 야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야산이라는 인물에 대한 최초의 정보를 입수한 시기는 5년 전쯤이다. 중국의 선종(禪宗) 사찰들을 답사하면서 건국대 이 준 교수와 동행한 적이 있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이 준 교수와 중국 장시(江西)성의 시골 허름한 여관방에 같이 묵으면서 뜻밖에도 불교의 고승들과 도교의 도사들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가 야산이 남긴 일화였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 무렵부터 야산은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녔다. 영낙 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닌 야산은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치장에서도 횡설수설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흥얼거리니 일본 경찰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판정하고 방면하였다. 유치장 문을 나가면서도 야산은 경찰관을 향해 ‘대한독립만세여!’하고 중얼거리며 나갔다고 한다. 8월13일 경남 청도의 화계리(花溪里) 오씨(吳氏) 집에 머무르던 야산은 따르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경사스러운 일을 들으러 가자!”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1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문경면(聞慶面) 문경리(聞慶里)로 십수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간 제자들에게 야산은 잔치를 벌이라고 하였다. 문경리의 촌로들을 모아놓고 닭고기와 술을 대접하는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야산은 “오늘같이 기쁜날 내가 닭춤을 한번 추겠다”하면서 잔치마당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것 아닌가. 속을 모르는 제자들은 “우리 선생이 요즘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 같더니 정말 돌았는지 모르겠다”면서 걱정스럽게 야산의 닭춤을 구경하였다. 8월14일 저녁 가져간 돈으로 문경리의 촌로들에게 술과 닭고기를 대접하면서 흥겹게 논 다음날, 15일이 되었다. 제자들은 그날 36년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제자들은 광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산은 민족의 해방이라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기 위하여 장소도 비상한 곳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장소’에서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일’을 한다고 했던가. 비상한 장소, 그게 바로 문경(聞慶)이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는 뜻 아닌가.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는 그 경사스러움이 트리플로 겹치는 곳이다. 해방 하루 전인 14일 잔치판을 벌여 놓고 닭고기를 먹으면서 닭춤을 추었으니 절묘한 무대연출 아닌가. 닭은 바로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메신저(messenger) 아니던가. 1980년대 암울한 시절 누가 그랬던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한 퍼포먼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
잡동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