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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者

라마나 마하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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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때 자신의 육체를 내려놓고, 스스로의 진아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을 통해, 자신의 영원한 본질을 자각하고 깨달음을 얻은 대 성인입니다.
17세때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 집을 나와서 성산 아루나찰라 산에서 평생 명상하며,
그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며 살아가셨던 위대한 성인입니다.

그에 대한 소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Sri Ramana Maharshi)
(1879. 12. 30 ~ 1950. 4. 14)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남인도의 성산 아루나찰라에 살았던 이 시대의 스승이다.
티루반나말라이의 라마나스라맘을 통해 우주적이고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침을 펼치는 성자가 있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 1950년 4월 14일 마하사마디에 들 때까지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분명한 깨달음의 눈빛을 보내 주었고
침묵의 힘으로 가르침을 전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인류에게 제시한 그가 이 땅으로 가져온 것은 또하나의 새로운 종교나 철학이 아니며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리를 찾아 열망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새로운 희망이며 새로운 길이다.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 남부 마두라이(Madurai)에서 30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티루출리(Tiruchuli)에서는 매년 쉬바(Siva)신을 모시는 아루드라 다르샨(Arudra Darshan) 축제가 열린다. 아루드라 다르샨 축제는 쉬바가 헌신자들에게 나타라자(Nataraja)의 모습으로 나타난 날을 기리는 데서 시작되었다. 1879년 12월 29일, 헌신자들이 고색창연한 부미나타(Bhuminatha) 사원에서 쉬바 나타라자 상(像)을 꺼내어 티루출리 시가를 지나는 행렬을 이루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사원 가까이 있던 순다람 아이어(Sundaram Iyer)와 그의 부인 아라가말(Alagammal)이 살고 있던 집에는 두 번 째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느라 밤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아라가말이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몸에 전에는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경이로운 광채가 났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난 새벽 1시 경, 축제에 모인 인파가 돌아가고 꽃으로 둘러싸인 쉬바신의 상이 다시 부미나타 사원으로 들어갈 무렵, 순다람 아이어의 집에서 쉬바가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벤카타라만(Venkataraman), 훗날 세상사람들에게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Bhagavan Sri Ramana Maharshi)로 불리게 될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 방에는 눈먼 간호원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 황홀한 빛을 느끼고는 아라가말에게 “지금 태어나고 있는 아이는 성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벤카타라만은 아라가말과 순다람 아이어 부부의 4자녀 중 둘째로, 아버지 순다람 아이어는 자수성가하여 성공한 변호사였으며 티루출리에서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명망이 드높았다. 그는 밤중에 자신의 마차를 습격한 도적 떼마저도 그를 경외하여 조용히 물러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내 아라가말은 부지런하고 성품이 온화한 주부였으며 그녀의 내적인 영혼의 힘은 훗날, 아들의 영적 가르침 아래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순다람 아이어의 집은 늘 손님들과 순례자로 인해 붐볐는데, 그는 이층으로 집을 지어 반은 가족을 위해 사용했고 나머지 반은 손님과 순례자를 위한 공간으로 할애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생가에서는 매일 의식이 행해지고, 많은 순례자들이 발길을 잇고 있다.

소년 벤카타라만은 비슷한 신분의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은 마을 밖을 흐르는 쿤디냐(Koundinya) 강을 즐겨 찾곤 했는데 훗날 그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마을 밖을 흐르는 쿤디냐 강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근처의 칼리야나(Kalyana) 사원에 있는 링가(linga)에 물을 붓기도 하고, 음식을 바친 후 그것을 먹기도 했다. 사원 가까이 사는 아이들도 몰려와, 함께 날이 저물도록 놀다가 집에 돌아갔다.” 이렇게 행복한 12년간의 어린 시절이 흘렀다.

1891년 벤카타라만은 티루출리에서 북쪽으로 70마일 떨어진 딘디굴(Dindigul)에 있는 친척집으로 보내져, 딘디굴 시립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가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1년이 채 못되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즉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귀향한지 며칠 후인 1892년 2월 18일, 아버지의 임종을 맞게 된다. 시신이 화장되기까지, 벤카타라만은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시신과 상관없이 모든 육체적, 정신적 행동에 책임이 있는 어떤 다른 힘이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몸이 아버지가 아니듯이 인간의 몸이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가장을 잃은 벤카타라만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어머니 아라가말과 여동생, 막내 동생은 고향 근처의 친척집으로 갔으며 벤카타라만과 그의 형은 마두라이에 있는 작은 아버지 수바 아이어(Subba Iyer)의 집으로 보내졌다.

마두라이는 미나크쉬(Meenakshi) 사원으로 유명한 북적대는 대도시였다. 벤카타라만은 처음엔 스코트(Scotts) 중학교에 다니다가 아메리칸 미션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책 읽기나 공부보다는 바깥에 나가 운동과 각종 경기를 즐겨했다. 그는 학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나, 그래도 기억력이 남달리 뛰어났던 덕에 보호자인 작은 아버지를 걱정시키는 일은 없었다. 타고난 건강과 힘, 그리고 운동신경이 누구보다 뛰어난 그에게 바이가이(Vaigai) 강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친구들과 운동경기를 하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의 인생에 있어 어떤 진정한 의미나 목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년 시절, 벤카타라만은 지나칠 정도로 깊은 수면을 취하거나 반 숙면 상태로 죽은 듯이 누워있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상태들은 그의 타고난 영성과 깨달음을 예고하는 징조로 보였다.

그런 벤카타라만에게, 1895년 11월, 그의 16번째 생일 직전, 이 소년의 남다른 운명을 알리는 첫 번 째 전조(前兆)가 나타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깊은 내면에서 ‘아루나찰라’라는 소리가, 장엄하게 압도하는 그 무엇으로 빛나면서, 고동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소리가 아닌 묘한 진동으로 그의 영혼에 늘 지속되는 것 같았다. 이 고동치는 아루나찰라가 스툴라(stula) 아루나찰라로 그 자신을 드러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오신 친척 어른께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그가 아루나찰라(Arunachala)에서 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벤카타라만은 깜짝 놀라, “무엇이라, 아루나찰라에서 왔다고”라고 소리쳤다. 벤카타라만은 막연하게 아루나찰라가 매우 성스러운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며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친척으로부터 아루나찰라가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라는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 이름이라는 것을 듣고 그는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고동치고 있는 ‘아루나찰라’에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두 번 째 전조도 곧이어 나타났는데, 이것은 책으로부터 왔다. 벤카타라만은 숙부가 빌려온 페리아푸라남(Periapuranam)이라는 제목의 타밀(Tamil) 지방의 63명의 성자에 대한 책을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토록 지고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성스런 열정이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희열에 찼다. 진실로 아름다운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신과 하나가 된 성인들의 이야기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96년 7월 중순 숙부의 집 2층 방에 앉아 있던 벤카타라만은 마침내 생애 최대의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그를 소년에서 성자로, 단 한 순간에, 재빨리, 그리고 영원토록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 절정은 아무런 탐구도, 아무런 노력도, 아무런 의식적 준비도 없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 날 그는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었다. 평소에 그는 거의 아프지 않았으며 그날도 그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공포는, 전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렬하고 불가사의한 체험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무 도움도 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이렇게 죽겠구나”고 느끼고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나,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그때 오직 이 죽음의 문제를 그 스스로 그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죽음의 충격에서 오는 이 공포는 그의 마음을 내면으로 이끌고 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죽음이 왔다. 죽음이 무엇인가? 육체의 죽음으로 오는 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몸은 죽는다.” 그래서 그는 즉시 죽음의 일어남을 드라마틱하게 하였다. 그는 죽음의 탐구를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눕고는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몸을 뻗어 뻣뻣하게 하였다. 그는 소리가 입 밖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은 물론 ‘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몸은 죽었다. 이 몸은 뻣뻣한 채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이 죽는다고 내가 죽는가? 몸이 나인가? 몸은 말이 없으며, 고요하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의 완전한 힘을 느낀다. 내 몸과는 별개인, 나 속에 있는 ‘나’의 소리조차도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몸을 초월한 영(靈:참나)이다. 비록 몸은 죽음에 이르나 몸을 초월하여 있는 영은 죽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죽음을 초월한 영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둔한 생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사고 과정이 없이, 그에게 직접적인 자각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진리로서 생생하게 섬광처럼 일어났다. 그에게 ‘나’는 분명한 실재로서의 그 무엇이었으며 자기 존재의 유일한 그 무엇이었다. 그의 몸과 관련한 모든 의식적 활동들이 그 ‘나’의 중심에 잡혀졌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후에 나, 즉 참나는 스스로 강력한 힘으로 그의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로 그에게는 ‘참나’ 속으로의 몰입이 끊어짐이 없이 지속되었다. 다른 생각들은 악보의 여러 음표처럼 오가고 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모든 다른 음표들의 토대가 되어 뒤섞이기도 하는, 바탕으로 있는 스루티(sruti) 음표였다. 몸이 말을 하거나 책을 읽는 등 그 무엇을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나’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 경험 이전에는 그는 그의 참나를 선명하게 지각하지 못했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에 끌리지도 않았다. 이 새로운 경험은 그의 인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더 이상 친구들이나 친척들과의 외적 관계나 운동경기를 즐기지 않고 한적한 곳을 좋아하였다. 이미 그 전부터도 별 흥미가 없었던 학업에는 더 이상 아무런 관심도 보일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다. 새로운 성스러운 깨달음에 휩싸인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몸이다.”라는 생각을 버린 그는 닻을 내릴 신성한 곳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근처에 있던 미나크쉬 사원으로 갔다. 깨달음의 경험이 있기 전에 간혹 친구들과 함께 들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매일 저녁 그곳으로 갔으며, 쉬바신이나 미나크쉬, 나타라자, 혹은 63인의 성자 상 앞에서 꼼짝 않고 오랫동안 혼자 서 있곤 하였다. 그곳에 서 있으면 감동의 물결이 그를 압도하곤 하였다.

깨달음이 있은 지 2개월 후, 마침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영어문법 과제를 하고 있던 벤카타라만은,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한 일이란 생각이 들어, 종이를 옆으로 치워놓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참나인 영 속에, 그를 만들고 있는 힘 혹은 흐름에 몰입하였다. 평소 형, 나가스와미(Nagaswami)는 이런 동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성자' 혹은 ‘요기’라고 부르면서 옛날 리쉬들(Rishis)처럼 정글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며 자주 놀리곤 하였다. 그 날도 곁에 앉아있던 형이 또 이런 모습을 보고는 “이런 애에게 영어 문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하며 질책했다.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사두(sadhu)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정 생활의 즐거움을 즐길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벤카타라만은 그 말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형에게 학교에 가서 전기과목 보충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어나 집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가 갈곳은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아루나찰라산이었다. 그의 형은 벤카타라만의 여비에 보태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가는 길에 아래층의 상자에서 5루피를 꺼내다 자신의 대학등록금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벤카타라만은 낡은 지도를 보고 티루반나말라이까지 가는데 3루피면 족하다고 생각되어 2루피는 남겨 놓고 낡은 지도를 통해 티루반나말라이로 가는 가장 가까운 역을 보아 두었다. 그것은 틴디바남(Tindivanam)이었다. 실은 얼마 전, 아루나찰라산이 위치한 티루반나말라이로 직접 가는 노선이 신설된 터였지만, 벤카타라만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저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버지를 찾아 여기를 떠납니다. 이것은 고결한 모험을 하려고 떠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 행동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 돈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형의 등록금은 아직 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2 루피가 동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맨 앞 문장에서 저로 되어 있던 것이 뒷 문장에서는 이것으로 바뀌어져 있고 다시 마지막 사인을 해야 할 부분에는 그냥 줄만 그어져 있다. 벤카타라만에게는 이미 사인을 할 ‘나’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가 1896년 8월 29일이었다.

절대자는 벤카타라만이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안내하고 있었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는 요금표에서 재빨리 틴디바남을 찾아냈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보았더라면 티루반나말라이를 발견할 수 있었을 테지만, 기차시간에 맞춰 서두르느라 그에겐 여유가 없었다. 기차표를 구입해 플랫폼으로 뛰어간 그는 아직 기차가 들어오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차에 올라탄 그는 승객들 사이에서 조용히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겼다. 기차가 몇 개의 역을 지나자,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수염을 기른 이슬람교도가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왔다. 그와 몇 마디 나누면서 벤카타라만은 티루반나말라이의 접경인 빌루푸람(Villupuram)역에서 기차를 갈아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새벽 3시에, 그는 빌루푸람역에 도착했으며 아침이 되자 그는 읍내로 들어가 티루반나말라이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곳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결국 길을 찾는 데 실패를 하고, 지치고 굶주린 그는 근처 식당 앞에 앉아 문이 열리는 정오를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후, 돈을 지불하였지만, 그의 아름다운 용모,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 및 사마디에 열중한 모습에 경탄하여 돈을 받지 않았다.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 그가 가진 돈으로는 맘발라파투(Mambalapattu)까지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맘발라파투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그날 오후, 맘발라파투에 도착한 그는 철로를 따라 30마일이나 떨어진 목적지인, 티루반나말라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11마일을 걸어가자 티루코일루르(Tirukoillur)라는 마을이 나왔다. 해가 저물었는데, 마침 그의 앞에 큰 바위 위에 지어진 아라야니나루르(Arayaninallur)라는 오래된 사원이 나왔다. 그곳은 천년 전, 갸나 삼반다(Jana Sambandha)라는 위대한 성인이 성스러운 산 아루나찰라를 처음 본 곳이기도 하였다.
벤카타라만은 뙤약볕 아래 오랜 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지쳐서 사원 바깥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때 한 스와미(Swami)가 푸자(Puja)를 드리기 위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사원에 들어가서 기둥으로 떠받쳐진 홀에 앉았는데,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순간 밝은 광채가 온 사원에 퍼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안쪽의 지성소에 있는 신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보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물리적 근원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명상하기 위해 앉았다. 그가 만타팜(Mantapam)에 앉아 있는 동안, 먼저 신 아루나찰레쉬바라(Arunachaleswara)가 먼저 빛의 모습으로 다가오다가 나중에는 갸나 삼반다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는 자신이 페리아푸라남에 나오는 63인의 성자 중 한 분인 삼반다(Sambandha)의 상 곁에 앉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명상에 잠겨 있는데, 사원의 요리사가 푸자가 이제 끝났으므로 문을 잠글 시간이라고 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배고프고 지친 벤카타라만은 사제에게 음식을 부탁하였지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가는 킬루르(Kilur)에 있는 사원으로 가면 음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요리사와 사제와 함께 그는 두 사원을 갈라놓고 있는 페나이야르(Pennaiyar) 강을 건넜다.

킬루르에 있는 사원에 도착한 그는 또 다시 깊은 몰입상태에 잠겼다. 밤 9시에 푸자가 끝났다. 벤카타라만은 다시 음식을 청했다. 그러나 그의 몫은 없었다. 그의 뛰어난 용모와 경건한 태도에 감명을 받은 사원의 북치기가 자신의 몫을 그에게 주었다. 벤카타라만은 음식을 손에 든 채 지친 몸을 이끌고 음식을 손에 들고 사원 바깥의 좁은 시골길을 걸었다. 몇걸음 걷지 못하고 그는 음식을 떨어뜨리면서 길바닥에 실신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걱정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흩어진 밥알을 주워 모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원의 프라사드(prasad) 이었기 때문이었다.
마투크리슈나 바가바타(Mathukrishna Bhagavatar)가 마침 그 무리들 중에 있었다.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이 브라민 소년에게 감동을 받아, 먼 길을 가고 있는 소년의 애처로운 사정을 알고서 벤카타라만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다음날인 8월 31일 월요일은 고쿨라쉬타미(Gokulashtami) 즉, 슈리 크리슈나의 기념일이었다. 자애로운 이 부부는 그에게 음식을 충분히 대접하고 정오까지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벤카타라만은 브라만 계급의 사내아이들이 몸에 지니는 루비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의 값어치가 20루피는 족히 되었다. 자신의 귀걸이를 기억해낸 그는 집주인에게 그것을 주며 목적지까지 기차표를 살 수 있도록 4루피를 빌려달라고 했다. 집주인은 그가 나중에 다시 귀걸이를 찾아갈 수 있도록 서로의 주소를 교환했다. 그리고 집주인은 슈리 크리슈나에게 푸자로 바쳤던 사탕을 봉지에 싸서 주었다. 순례자 벤카타라만은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티루반나말라이로 가는 기차는 다음날 아침에 떠나기 때문에, 그는 그날 밤을 기차역에서 보내야만 했다. 1896년 9월 1일 아침, 집을 떠난지 사흘만에 그는 마침내 목적지인 성스러운 아루나찰라 산이 있는 티루반나말라이 역에 도착했다.

기쁨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숨에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으로 향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사원의 세 큰 문을 포함한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으며, 안쪽에 있는 성소(聖所) 조차도 그러하였다. 성소에 홀로 들어가 빛의 링가인, 아루나찰레쉬바라 앞에 서자 격정이 소용돌이치면서 그는 링가를 껴안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버지에게 제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도착을 고하였다. 벤카타라만은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불길처럼 소용돌이치던 격정이 가라앉으면서 완전한 엑스터시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다. 마침내 합일의 희열 속에서, 그의 여정은 끝을 맺었다.




사원을 나오자마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머리를 깎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슈리 아루나찰라가 바라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렇게 했다. 그곳은 아얀쿨람(Ayyankulam) 저수지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그는 아얀쿨람 저수지에 그가 갖고 있던 3루피가 조금 넘는 돈과 아직까지도 지니고 있었던 사탕봉지를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던져 버렸다. 그 후로 그는 평생 돈을 만진 적이 없었다. 브라만 계급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끈도 던져버리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을 찢어 간단한 허리 가리개 하나를 만들어 걸쳤다. 자신이 알지도 못한 채 일어난 이러한 모든 포기의 행동을 마친 후, 그는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으로 되돌아왔다. 예로부터 머리를 깎은 후에는 목욕을 하여 몸을 정결히 해야하는 관습이 있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지만, 슈리 아루나찰라가 구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가 사원에 가까이 가는 순간,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와 몹시 추웠다. 그래서 그는 가까이에 있는 집 베란다에서 비를 피했다. 한 밤 중에 그 집안에 있던 사람이 나와 거리로 나 있던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은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 가까이 있던 구루 칼(Gurukal)집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원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며칠 동안 비가 왔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목욕해야 한다는 것을 만족시키기 넘치는 비였다.

만타팜(Mantapam) 홀에 있은 이틀 째 있는데, 침묵하고 있던 한 스와미가 한 친구와 더불어 그곳으로 왔다. 그는 침묵의 스와미였으며, 벤카타라만도 그랬다. 아무런 말도 인사도 없었다. 그는 몸짓으로 그의 친구에게 “나는 이 소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피곤해 보인다. 약간의 음식을 구해 다 주어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주석 쟁반에 담긴 밤과 오이 피클이 왔다. 매 밥알은 물들여 있었다. 지하실에는 시큼한 물도 있었다. 슈리 아루나찰레쉬바라가 벤카타라만에게 준 첫 번째 빅샤(biksha)였다.
모든 의식을 마친 벤카타라만은 일 천 개의 기둥이 있는 만타팜 홀의 한쪽 구석에 앉아 사마디에 들었다.

그는 참나를 발견한 환희에 완전히 잠겼으며 낮이 가고 밤이 오기를 반복해도, 사마디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몇 주 동안을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깊은 환희에 잠겨 있었다. 자기들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말없이 앉아 사마디에 빠진 것을 본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며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티루반나말라이에 온 세샤드리 스와미(Seshadri Swami)가 이제 브라마나 스와미(Brahmana Swami)라고 불렸던 벤카타라만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막아보려는 세샤드리 스와미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브라마나 스와미는 일 천 개의 기둥이 있는 홀 아래의 지하 사원인 파탈라 링감(Pathala Lingam)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둡고 습한 이 지하실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드물었고, 일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개미, 지네, 모기 등 온갖 해충이 우글거렸다. 이곳에서 외부 세계의 모든 것을 잊고 사마디에 몰입한 그에게는 이미 몸에 대한 의식도, 감각도 사라졌다. 벌레들이 그의 몸에 다가와서 허벅지와 발을 물어뜯어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나중에는 이것이 고름과 한데 엉겨서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물린 자국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가장 강렬한 타파스(tapas)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타파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 없었던 몸을 그냥 잊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이미 지반묵타(jivanmukta)였으며 씻어내야 할 아무런 카르마도, 얻어야 할 더 이상의 목표도 없었다.
지하실에서 지낸 약 두 달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러나 참존재를 발견한 환희에 젖어든 그는 어떤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샤드리 스와미가 우연히 지하실 앞을 지나다 아이들이 그곳에 돌을 던지는 걸 보았다. 아이들이 던진 돌은 구석에 앉아 있던 브라마나 스와미에게는 이르지 못하였다. 아이들을 쫓아내고 지하실로 들어선 그 사람은, 주변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는 한 스와미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를 깨우려고 소리를 질렀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으며 몸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사마디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이 그의 몸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그를 안아들었을 때, 바닥의 흙과 뒤범벅이 된 그의 수많은 상처에서 피와 고름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몸을 망각한 깊은 사마디에 빠질 수 있는지 놀라면서 그를 들어서 지하실을 나와 근처의 수브라마니야(Subramanya) 사원으로 옮겼다. 어떤 스와미가 그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사마디에서 깨어나지 않아 도무지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씩 입을 벌려 음식을 떠 먹여 주어야 했으며, 때로는 몇 주 동안 허리 가리개를 묶을 생각도 않고 지낼 때도 있었다. 몇 주가 흐른 뒤, 그는 사원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또 후에는 꽃밭, 바나나 숲 등에 있었다. 어떤 때는 사원의 축제행사 때 쓰는 수레를 보관하는 곳에 있기도 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마디를 계속 했다. 브라마나 스와미가 일루팔(illupal)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부는 바람은 너무 매섭기도 하였다. 내린 이슬이 그의 몸을 하얗게 뒤 덥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추워 두 팔로 가슴을 감싸기도 하였다. 두 팔이 그가 입은 유일의 옷이 된 것이다.

이렇게 거의 6개월 가까이, 그는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에 머물렀고, 그 동안 그의 깊은 사마디는 계속 되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그는 마치 자다(jada)처럼 앉아있다. 그는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즐겼으며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오기를 바랬다. 심지어 그는 사마디 중에 이동하기도 하여, 가끔씩 그가 눈을 뜰 때면, 자신이 어떻게 그 장소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매월 11월이나 12월쯤 개최되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횃불을 담고 있는 아루나찰라산을 기리는 카르티가이((Kartigai) 축제에는 수 천명의 순례자들이 아루나찰라로 모여들곤 했다. 그런 브라마나 스와미는 이 축제에 모인 순례자들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신과 일치된 성자를 보았던 것이다. 브라마나 스와미를 돌보던 사두가 사람들을 쫓아버리려 애를 썼으나 허사일 때가 많았다. 이렇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사마디에 방해를 받자, 누군가 마을밖에 있는 구루무르탐 사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브라마나 스와미도 손짓으로 이것을 허락했다.

브라마나 스와미가 티루반나말라이에 도착한지 6개월 지난 1897년 2월, 그는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을 떠나 구루무르탐(Gurumurtam) 사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곳에서도 그의 생활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사원에 앉아 모든 정신과 감각을 성스런 것에 집중시켰다. 그는 하루 한 컵의 음식만을 먹었으며, 절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그가 침묵의 맹세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말하거나 어떤 변화도 일으키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와 손톱은 제멋대로 자라났고, 그의 몸은 온갖 더러운 오물로 얼룩졌으며, 영양이 부족한 탓에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 무렵 바로 이곳, 구루무르탐 사원에서 그의 최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팔라니스와미(Palaniswami)가 그를 찾아 왔다.

팔라니스와미는 원래 비니야카(Vinyaka) 신을 숭배하는 사람으로 하루 한끼 삭사를 하고 있었다. 슈리니바사 아이어(Srinivasa Iyer)가 돌을 숭배하고 있는 그를 보고 “돌 스와미를 숭배하느라 평생을 보낸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구루무르탐에 깊은 명상에 든 스와미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를 찾아 구루무르탐 사원으로 와서 그를 처음 보는 순간 그가 자신을 구원해줄 참스승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부터 팔라니스와미는 정오가 되면 꼭 한 컵의 식사를 그에게 올렸으며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며, 그 후로 21년간 자신의 여생을 바쳐 스승을 모셨다. 브라마나 스와미를 찾아오는 순례자와 구경꾼이 날로 늘어 이곳마저 소란해지자, 사원에 이웃한 망고과수원 주인이 자신의 과수원을 내주면서 그곳에 머물도록 했다. 1898년 5월, 구루무르탐에서 지낸 지 1년이 좀 넘어, 브라마나 스와미와 제자들은 과수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은 망고나무가 다 사라진 그 자리에, 벼를 키우는 논이 조성되어 있지만, 젊은 성자가 살던 곳의 성스런 기운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듯 하다.

벤카타라만이 과수원으로 거처를 옮겼을 무렵, 마두라이의 숙부가 운명했다. 숙부의 장례식에서 가족들은 집을 나간 벤카타라만이 티루반나말라이에서 존경받는 스와미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머니 아라가말은 시동생 넬리아파 아이어(Nelliappa Iyer)에게, 가서 아들을 데려오도록 부탁하였다. 친구와 함께 티루반나말라이에 도착한 넬리아파 아이어는, 자신의 조카가 높은 영적 경지에 들었음을 감탄했으나, 형편없는 고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조카에게 친척들이 그의 고행 생활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제발 자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사정했으나 브라마나 스와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넬리아파는 설득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이 소식을 아라가말에게 전했다. 그 후, 망고과수원에서의 평온한 6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이제 망고 숲은 더 이상 편리하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음식을 구하려 떠나면서 아루나기리나타르(Arunagirinatar) 사원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제자 팔라니스와미가 그를 따라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이 사원에서 한 달, 그리고 아루나찰레쉬바라 사원에서 또 한 달을 보낸 뒤, 그는 아루나찰라 산의 동쪽 봉우리인 파바라쿤루(Pavalakkunru)로 올라갔다. 그는 이곳에 있는 작은 사원에 앉아, 또 다시 참존재가 주는 깊은 희열의 사마디에 빠졌다.

1898년 말, 바로 이곳에서 어머니 아라가말은 아들을 발견했다. 아들이 앉아있는 곳까지 계단을 따라 올라간 어머니는, 아들의 여윈 몸과 헝클어진 머리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애처러운 자식의 모습을 보고서 어머니로서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날이면 날마다 아들에게 돌아가자고 애원하고 간청하였다. 심지어 호통을 치기도 했지만, 아들은 꼼짝 않고 앉아있기만 했다. 마침내 어머니는 마지막 방법으로 그를 따르는 헌신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 결국 벤카타라만은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영혼의 운명은 각자의 프라랍다(prarabhda) 카르마에 따라 그분에 의해 다스려집니다. 일어나지 않도록 운명지어진 것은 어머니께서 아무리 노력하여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날 운명인 것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결국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에 머무는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는 그의 굳은 결심을 확인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발길을 돌렸다.

거기에 머물 때 한번은 팔라니스와미가 라마야남(Ramayanam)이라는 책을 가져왔다. 브라마나 스와미는 그 속에 쓰여진 것이 이미 그 스스로 경험했던 내용임을 발견하였다.
어머니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마나 스와미는 아루나찰라 산 윗쪽으로 올라갔다. 그 후로 1922년까지, 그는 주변 사정에 따라 산의 여러 동굴을 전전했다. 처음에는 슈리 아루나찰라 산의 동남쪽에 있는 삿구루(Satguru) 스와미가 머물렀던 동굴에 지냈으며, 이 동굴은 나중에 아라마라투 구하이(Alamarathu Guhai)라 불렀다. 거기에서 그는 더 윗 쪽에 있는 구후 나마쉬바야(Guhu Namasivaya) 동굴에서 짧은 기간 동안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마침내 비루팍샤(virupaksha)동굴에 왔다. 거기에서 1916년까지 머물렀다.

그 동굴은 신성한 소리 옴(OM) 형상을 하고 있었다. 13세기에 살았던 성자 비루팍샤의 유적을 간직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 동굴 옆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여름철에는 동굴이 너무 뜨거워지고 시냇물은 말라버리곤 했다. 그래서 브라마나 스와미와 제자들은, 여름철에는 보다 시원하고 주변에 물도 풍부한 망고나무 동굴로 거처를 옮기곤 했다.
어느 날 비루팍샤 동굴로 돌아오면서, 그는 그의 두 번째 죽음의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났다. 이번에 그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실로 죽음 그 자체였는데 이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기 내 앞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얀 천 같은 것으로 가려졌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나타나곤 하다가 나중에는 사라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하얀 천으로 눈앞의 광경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천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두 번 일어났다. 나는 점점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버티기 위해서 거북 모양의 바위에 기대었다. 그것이 세 번째 일어났을 때 나는 바위 위에 앉았다. 내 주위가 온통 하얀 천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혈액 순환과 심장 박동이 멈추었고 나의 몸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몸은 마치 시체와 같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현상이 더 깊어졌을 때, 시중들고 있었던 바수(Basu)는 내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내 몸의 색깔이 변하는 것, 바수가 날 안는 것, 그의 몸이 떨리는 것,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 모두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나의 손과 발이 식어가며 나의 심장 박동이 멈추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나의 내부에는 전혀 공포가 없었다. 나는 뚜렷하게 이 모든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나의 몸의 상태에 대하여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에너지가 내 온 몸에 퍼졌으며 혈액의 순환과 심장의 박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두 번째의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비록 그의 내면적 신성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까지의 방관자적 관점에서 인류를 위한 영적 봉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하였으며, 오랜 자발적인 침묵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욕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을 정화하여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그가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오면 그냥 고요히 앉아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서 그윽한 연민의 눈길을 보내기만 하였다. 그러면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에 휩싸이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동안 쌓여왔던 모든 것이 녹아 내리는 걸 느끼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그의 발 밑에 엎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침묵의 가르침이었다. 이 침묵의 가르침은 글이나 말을 통한 어떤 가르침보다도 훨씬 확실하고 강렬하였다. 글이나 말을 통하면 제한되어버리고 왜곡되어버리는 진리가 침묵 속에서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면서 전해질 수 있었다. 그에게는 침묵의 힘이 있었으며 그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바로 이 침묵에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방황하던 마음은 고요해졌고, 오랫동안 갈구해왔던 영적 체험이 일어났다. 때로는 브라마나 스와미는 제자들에게 지시나 설명을 하기 위해 종종 글을 써 주곤 했으며, 침묵 때문에 제자들의 영적 수행이 곤란한 적은 없었다. 그는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제자들에게는 침묵을 통해서 그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전하고, 그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해서 가르침을 주었다

아루나찰라에서 지낸 초창기, 그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으며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녔으나 그가 뿜어내는 광채는 그의 주변에 이미 상당한 수의 제자가 모여들게 하여 자연스레 아쉬람이 형성되었다. 그의 희열의 참나에서 나오는 광채, 그의 현존 그리고 그의 바라봄은 사람을 변화시켜 영적 열정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암중모색하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자비로 그는 그들이 던진 질문의 답을 종이 쪽지에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1902년, 공무 차 티루반나말라이에 들른 쉬바프라카삼 필라이(Sivaprakasam Pillai)가 이 젊은 성자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즉시 산을 올라 브라마나 스와미를 만난 그는, 처음 보자마자 이 스와미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14가지 질문을 던졌고, 브라마나 스와미는 여전히 침묵 중이었으므로 질문과 답은 모두 글로 전해졌다. 이때 주고받은 문답이 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엮어져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라마나의 초기 가르침을 담은 이 작은 책은, 그가 세상에 전한 가르침의 정수를 모두 담고 있다.





그러나 브라마나 스와미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위대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가나파티 무니(Ganapati Muni)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던 그는 놀라운 기억력과 무한한 능력을 지닌 동시에, 정직하고 마음이 따뜻하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서, 누구든 그의 앞에 있기만 해도 존경심이 우러나는 인물이었다. 1903년, 당시 25세의 젊은이였던 그는 티루반나말라이가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하여 이주를 했다. 그러나 1907년경에 이르자, 회의가 물밀듯 밀려왔다. 어느 더운 날 오후, 몹시 흥분한 그는 산을 올라 브라마나 스와미를 찾았다. 브라마나 스와미의 발아래 이른 그는 격정에 차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책을 다 읽었습니다. 심지어 베단타 샤스트라까지도 완벽히 이해했습니다. 또 최선을 다해 자파를 행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저는 타파스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의 발아래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저를 깨우쳐 타파스가 뭔지 가르쳐 주십시오.” 브라마나 스와미는 조용한 눈빛으로 그를 15분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했다. “‘나’라는 인식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면, 그때 마음은 그것(That)에 흡수된다. 이것이 타파스니라. 만트라를 반복할 때, 만트라의 소리가 나오는 근원을 관찰하면, 마음은 그것(That)에 흡수된다. 이것이 바로 타파스니라.”

이에 가나파티 무니의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히 브라마나 스와미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에게서 분출되는 은총과 연민의 힘 때문이었다. 스와미로부터 나오는 자비의 힘에 압도된 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는 브라마나 스와미를 위한 산스크리트 시를 지었다. 팔라니 스와미로부터 브라마나 스와미의 원래의 이름이 벤카타라만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 브라마나 스와미를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Bhagavan Sri Ramana Maharishi)”로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바가반’은 ‘전능하신 신’을, ‘슈리’는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브라마나 스와미의 원래의 이름인 벤카타라만을 줄여 “참나 속에 즐겁게 있는 자”라는 의미인 라마나로, ‘마하리쉬’는 보통 현자인 리쉬가 아니라 베다 시대의 브야사(Vyasa)와 같은 현자라는 의미에서 마하리쉬라 하자고 하였다. 이 때부터 브라마나 스와미로 불리웠던 벤카타라만은 ‘라마나’로 또는 ‘마하리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선 ‘바가반’이 가장 일반적인 호칭으로 쓰였다.

가나파티의 도움으로 브라마나 스와미의 아쉬람을 찾은 최초의 서양인은 F. H. 험프리라는 영국 경찰관리였다. 그는 영국에 있는 친구에게로 보내는 편지에서 이 신비한 침묵의 힘을 이렇게 썼다. “동굴에 이르러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발아래 앉아 있기만 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앉아 있었는데,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빠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약 30분간 마하리쉬의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 깊은 응시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의 육체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도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움직임 없이 앉아 있는 그의 육신으로부터 신의 빛이 발하고 있었다. 그 때 나의 느낌은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슈리 바가반의 은총은 구도자의 가슴에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 아이들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슈리 바가반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렸다. 읍에 살고 있던 아이들도 비루팍샤 동굴로 와서, 슈리 바가반 주위에 앉고, 그의 주위에서 놀고는 행복한 느낌을 안고서 돌아갔다. 몸이 몹시 아픈 채 아들을 찾아왔던 어머니를 위해 슈리 아루나찰라에게 기도하자 깨끗이 나았다.

1916년, 라마나의 어머니 아라가말이 여생을 아들과 함께 보낼 작정으로 아루나찰라에 찾아왔다. 그녀는 장남을 잃었고, 막내며느리 또한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은 터였다. 막내아들 나가순다람은 아가멜루에 사는 아이 없는 누이에게 어린 아들을 맡기고, 어머니와 함께 성자가 된 형을 찾아 수행의 길에 나섰다.

어머니가 온지 얼마 후, 라마나는 비루팍샤 동굴에서 보다 윗쪽으로 옮겼다. 슈리 아루나찰라의 동남쪽 기슭에 나무들이 무성한 곳이 있었는데, 제자 칸다스와미(Kandaswami)가 이곳에 아쉬람을 짓자고 슈리 바가반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칸다스와미는 숲이 무성하던 곳을 망고와 코코넛 나무가 있는 아쉬람으로 변화시켰다. 슈리 바가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제자의 이름을 따 스칸다아쉬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타밀어 칸다는 스칸다였다.

이후 슈리 바가반은 스칸다(Skanda) 아쉬람으로 거처를 옮겨 1916년부터 1922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동안에 많은 제자들이 와서 그와 함께 아쉬람에 머물렀으며 점차 어머니는 슈리 바가반의 헌신자들을 위하여 아쉬람의 부엌일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는 나머지 생애 동안 슈리 바가반에게 먼저 음식을 올리지 않고는 자신의 음식을 결코 먹지 않는 깊은 헌신을 아들에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슈리 바가반은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세상의 삶을 벗어난 영적인 삶을 살도록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아들은 이제 어머니의 눈에도 성스런 존재로 비쳤다. 스칸다 아쉬람에서의 생애 마지막 몇 년 간, 그녀는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아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으며 아들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아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두려워, 단 하루라도 아들과 떨어져 있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네가 내 시신을 가시덤불에 던져 버린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네 품안에서 날 죽게 해 주렴.”하고 말했다. 그리고 1922년 5월 19일, 운명의 날, 그녀는 소원대로 아들의 품안에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특별한 손길 아래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비로소 완벽한 사마디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산 남쪽 기슭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해방된 영혼인 갸니에 행해지는 엄숙한 예식을 치른 후 묻혔다. 어머니의 무덤 곁에는 작은 사원이 세워졌고 마하리쉬는 그곳에 매일같이 들렀다. 마하리쉬의 동생이 이 사원에 아예 기거하기 시작했고, 몇달 후, 마하리쉬도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스칸다 아쉬람의 제자들도 모두 그를 따라 내려왔고, 그리하여 형성된 것이 슈리 라마나스라맘(Sri Ramanasramam)이다.

처음엔 어머니의 무덤 곁에 세워진 허름한 초가 오두막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도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순례자와 제자들이 모여들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하리쉬가 기거하기 위한 약 50평 정도의 홀이 세워졌다. 그가 소박한 것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곳에 그를 앉히기 위한 긴 의자 하나를 강제로 들여놓았다. 그 후로 이곳은 그가 하루 24시간 기거하는 곳이 되었다.

마하리쉬는 매일 규칙적인 일정에 따라 생활했는데, 그 중엔 하루 두 번 산책도 포함돼 있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루나찰라 산을 오르곤 했다. 이 세상에 그가 집착하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루나찰라 산이었다. 그는 이 산을 사랑했고, 이 산이 바로 신(神)이며, 이 세상의 심장, 혹은 영적 중심이라고 말했다. 아루나찰라의 산기슭을 돌아다닐 때 그는 가장 행복해 보였으며,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아루나찰라 산에서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8마일에 이르는 산 주위를 산책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이렇게 아루나찰라를 도는 것을 기리푸라닥쉬나(Giripradakshina)라 하며,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수행의 하나였다. ‘푸라(pura)’는 모든 죄의 없앰을, ‘다(da)’는 갈망의 충족을, ‘크쉬(kshi)'는 환생으로부터 자유를, ‘나(na)'는 참나 지식으로 해방을 주는 이라는 의미이다.
대개의 경우, 마하리쉬는 주변의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하였으며, 지켜보는 자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한 일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모든 방문객과 제자들이 자신을 언제든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에게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마지막 날까지도, 이 원칙은 이어졌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또한 그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도착과 동시에 식사를 대접해야 하며, 이들의 식사는 잘 요리된, 영양가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주방 일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마하리쉬는 음식이나 안락함에 있어 자신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누군가 특별한 음식이나 보약을 가져오기라도 하면 그는, ‘나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도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야 자신도 그것을 취했다.



그는 성별이나 신분(카스트), 인종과 종교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왕자건 농민이건 그에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의 이러한 평등한 태도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동물과 식물에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동물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은 저 유명한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성인에게나 견줄 수 있는 것이었다. 동물들은 늘 그를 따랐다. 개, 원숭이, 뱀, 까마귀, 사슴, 공작새, 소 등.... 무엇 할 것 없이 이들의 무언(無言)의 언어는 마하리쉬에게 전달되었고, 그가 말할 때면 동물들이 알아듣고 순종하였다. 그는 원숭이들의 다툼을 중재하기도 했고 표범이나 코브라의 말을 할 줄도 알았다. 동물세계 전체가 그를 지도자이자 보호자로 받아들였다. 모든 동물이 그의 자비를 느꼈고, 그 앞에서는 지능을 갖춘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을 평등하게 취급하였으며 그를 찾아오는 것이 무엇이든 라마나스라맘의 땅과 자원을 동등하게 분배하였다. 그는 이것이 처음부터 동물들의 영토였으며 우리 인간이 그것을 차지했을 뿐, 만일 동물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그들 역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에서부터 미세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불멸의 지고의 존재인 ‘참나’가 동등하게 구현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심지어 동물조차도, 드문 경우지만 영적 성장을 거듭하여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마하리쉬는 늘 깔끔하고 정갈했다. 그는 매사에 시간을 정확히 지켰으며 어느 행동 하나 헛되이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아쉬람의 그 무엇도 낭비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가 아쉬람 마당에 떨어진 곡식 한 톨을 주워 제자리에 갖다 놓는 모습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행하였고,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해냈다. 그에게 쏟아진 많은 이들의 관심도 그에게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는 그 누구로부터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지고의 ‘참나’가 가져오는 태초의 충만함에 늘 만족하고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그의 성격은 완벽함에 가까웠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면은 인간적인 것에 있지 않고 성스러운 것에 있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의 힘은, 마치 신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의 존재에 있었다. 그의 앞에 있기만 해도, 그의 침묵의 힘에 이끌려 많은 이들의 고통받은 마음이 달래지고, 보다 성숙한 영혼들은 영적 성취단계인 참나 깨달음으로 이끌어졌다.

진지한 구도자들이 그의 곁에 몰려들었고, 이들의 간절한 열망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이들에게 그대로 보답되었다. 마하리쉬는 제자들에게, 비록 사람이 혜안을 얻고, 초자연적인 소리를 듣고, 심지어 자신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이나, 물건을 만들어 내는 초능력을 얻는다 해도, 마음이 완전히 침묵하여 ‘참나’의 씨앗인 가슴 속 깊이 가라앉지 않으면, 진정한 참나를 깨달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의 안내는 제자들로 하여금 육체와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 가슴 속의 순수한 ‘참나’를 일깨우도록 하였다.
눈빛과 존재의 힘만으로도, 그는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써 제자들은 완벽한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자주 말하기를, 진정한 가르침은 침묵에 있다고 했으나, 그렇다고 그에게서 언어적 가르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여러 가지 영적 수행 방법을 가르쳤으나, 참나탐구의 길에 가장 큰 중점을 두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이 ‘나’라는 생각이다. 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나서야, 수많은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이 ‘나’라는 생각의 근원이 어디인지 마음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어 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 때, 참실재로서의 ‘나’가 ‘나’로서 나설 것이다. 그것은 비록 ‘나’라고 말하고 있으나, 자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갖가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를 찾았으나, 마하리쉬는 결코 그들에게 개종하거나 세상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질문에 참을성 있게 답해 주었으며, 결국은 그들을 참나로 이끌었다. 그는 “그대가 누구인지 알면 나머지 모든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누군가 그에게 행복에 대해 묻자, 그는 “행복은 그대의 진정한 본성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몸이나 마음과 동일시한다면 그대는 한계를 느끼고 고통을 받게 된다. 참된 행복의 문을 열기 위해는 그대의 진정한 참나를 깨달아라. 참나는 바로 실재이며 참된 지고의 진리로서, 그것은 그대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세계의 중심이다. 모든 ‘나’ 속의 참나. 몸이 곧 나라는 생각과 구분되는, 단 하나의 참된 불멸의 참나가 그것이다.”
그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수행을 위해 출가하거나 산에 들어앉아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며, 그것은 집에서건 산중에서건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어째서 일상의 일이 영적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활동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 활동이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곧 내가 행위자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나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종교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결말이 될, 자기 자신의 진정한 참존재를 향해 곧장 나아갈 것만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신분이나 성별, 주변 환경에 관계없이 누구나 행할 수 있다고 그는 가르쳤다.

마하리쉬는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았다. 실제로 그의 삶은 숭고한 참나를 깨달은 자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록 그는 순수한 자각의 상태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그의 육신은 자연의 법칙을 비껴갈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류머티즘에 시달리고, 날로 쇠약해져 갔다. 1949년 초, 그의 왼쪽 팔꿈치에 작은 혹이 생겼다. 그것은 곧 수술로 제거되었으나, 후에 재발했고, 악성종양으로 진단되었다. 1949년 12월에 한 네 번째 수술은 상당히 힘든 수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하리쉬는 끝내 마취를 거부하였다. 수술이 끝난 뒤 한 제자가 아프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고통도 바로 우리의 일부분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종양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병을 걱정하는 사람을 도리어 위로하였다. “그대는 마치 내가 어디로 가는 것처럼 슬퍼하고 있구나. 내가 어디로 가겠으며 어떻게 가겠느냐? 가고 오는 것은 몸에 있지 참나가 어디로 가겠느냐?” 재발한 종양은 왼쪽 팔에서 점점 커지더니, 그의 혈액을 부패시키고, 결국은 티없이 순수하고 자비로운 성자의 생애를 마감 짓게 만들었다.

그의 말년에 크나큰 육체적 고통이 찾아왔지만, 마하리쉬는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는 육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듯 보였고, 육신이 있다는 것조차 거의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은 점점 쇠약해져 가는 스승을 보며, 그가 떠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슬퍼하였다. 마하리쉬는 제자들이 육신에 너무 집착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은 제자들 눈앞에 보이는 병든 육신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거듭 강조하였다.

1950년 4월 13일, 의사가 그에게 효험 있다는 약을 가져왔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약은 필요치 않다. 모든 것은 이틀 안에 닥칠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아쉬람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그가 죽은 뒤 아쉬람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를 물었다. 그러자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쉬람을 지금까지 누가 운영해왔다고 생각하는가? 이 아쉬람이 나의 뜻이나 지시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는가? 이 아쉬람은 전지전능한 유일한 힘에 의해 운영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것이 이 아쉬람을 돌볼 것이다. 그대들은 아쉬람의 운영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음 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방을 가득 채우고 밖에까지 긴 줄로 늘어섰다. 질병에 시달린 그의 육신은 쇠약해지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나왔으며, 살갗은 검게 변해 있어,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마하리쉬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때때로 정신을 차려 방문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깨달음의 눈빛을 보내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죽지만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딜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여기 있다.”고 여러 차례 반복해 말하였다. 이것은 그의 육신이 생을 다하였다고 해서 그의 자비와 가르침이 방해받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는 가까이에 있던 쉬바난다(Sivananda) 스와미에게 문득 말하였다.
“산토샴(santhosham)” 쉬바난다가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그는 다시 설명을 하였다. “영어에는 Thank you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그냥 산토샴이라고 한다.”
바로 그 날 저녁 마지막 순간이 오기 직전, 홀 밖에 앉아있던 제자들이 아루나찰라 쉬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은 슈리 바가반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그는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깊은 숨을 한 번 내쉬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에게는 고통이나 경련, 혹은 그 밖의 어떤 죽음의 신호도 없었다. 단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홀 밖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방안에 환한 빛이 가득 차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놀라움으로 말을 잊고 있을 때 “빛이다. 빛이다.”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거대한 유성 하나가 천천히 밤하늘을 가로지르더니 아루나찰라 산 뒤로 사라져 버렸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목격했고, 심지어 멀리 마드라스에서도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다. 때는 1950년 4월 14일, 밤 8시 47분이었다.
다음 날, 제자들은 무덤을 파고 그의 시신을 모셨다. 가득 모여든 인파는 슬픔에 잠겨 그를 들여다보았다. 쉬바를 상징하는 반짝이는 검은 돌로 만든 링가가 그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그 후, 몰려든 인파는 흩어져 돌아갔다. 그리고 스승을 잃은 충격이 서서히 가시자, 제자들은 다시 티루반나말라이로 돌아왔다.
스승은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죽지만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딜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여기 있다.” 그들은 이 말이 진리임을 곧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마하리쉬는 그들의 내적인 구루가 되어, 보다 활발하게, 보다 직접적으로 구도자들을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이 어디 있던 간에 스승의 자비와 도움을 얻었고, 그의 내적 존재를 단순히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전에 없이 강해졌음을 느꼈다.
마하리쉬의 육체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그의 이름과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 그의 존재의 강한 영향력을 느끼곤 한다. 생전에 그가 기거하던 아쉬람 주변에는 많은 집과 오두막들이 들어섰다.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세워진 사원 역시, 보다 강력한 영적인 힘으로 가득 찼다. 이곳에서도 마하리쉬가 생전에 행했던 일상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날로 늘어나는 전세계의 순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아쉬람의 규모와 범위는 전에 없이 확장되었다.
삶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으며,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는 파괴할 수 없는 실재와 비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 완벽하게 평화로운 삶, 그리고 천상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온 인류에 보여주기 위해, 마하리쉬는 그의 생을 살며, 침묵의 힘으로, 가르침을 전했다. 그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화신이었다

(구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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